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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회복 | 라이프 인사이트

나를 이루는 선택의 잔상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선택의 가능성들'을 읽고

by 숨결 한 모금 2025. 6. 3.

책을 읽는 단발머리 여성의 따뜻한 수채화 일러스트
출처:챗gpt

조용히 건네는 한 사람의 취향이 마음을 흔들 때

우리는 살아가며 크고 작은 선택을 반복한다. 이직할지 말지,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할지, 혹은 오늘 점심엔 뭘 먹을지. 이런 선택들에는 의도가 있고, 사연이 있으며, 결국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파편이 된다. 하지만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그런 선택의 이유를 시끄럽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분한 감성의 언어로, 아주 소박한 기호와 태도를 나열하며 조용히 말한다. "나는 이런 걸 더 좋아해요." 그저 담담하게. 그러나 그 고요한 고백이 우리 마음엔 파문처럼 오래 남는다.

"영화를 더 좋아한다"라는 첫 줄에서 시작해, "여기에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로 끝나는 이 시는 철저히 고백문처럼 흐른다. 하지만 그 안엔 삶에 대한 성찰, 세상을 향한 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촘촘히 배어 있다. 이는 단순한 취향의 나열이 아니라, 쉼보르스카의 '살아있는 방식'에 대한 선언처럼 느껴진다.

'더 좋아한다'는 조용한 선언들

1. 진심은 설명이 필요 없는 '기울기'다

"인류를 사랑하는 자신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신을 더 좋아한다." 이 구절은 내가 이 시를 사랑하게 된 첫 번째 이유였다. 거대한 이념보다 작은 사람, 추상적인 가치보다 구체적인 관계를 더 중시하는 태도. 우리는 때로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무시하고, 공동선을 이유로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한다. 하지만 쉼보르스카는 그 모든 웅장한 이야기 앞에서 아주 작고 사적인 선택을 말한다. '인간 한 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쩌면 가장 진실된 도덕 아닐까.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시 안에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쪽이 조금 더 좋아요, 라고 말한다. 그게 사랑이고, 자유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2. 덜 편한 선택을 기꺼이 감수하는 마음

이 시의 기이한 매력은, 결코 편한 선택을 나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비난하는 것이 곧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말한 많은 것들보다 여기에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 쉼보르스카는 삶을 단정하지 않는다. 정리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건, 애매한 것들이고, 말끝을 흐리는 순간들이며, 완벽한 정의 대신 작은 온기다.

"질서 잡힌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는 말은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혼돈 속의 가능성과 변화, 그 안에 있는 살아있는 움직임. 반면, 정돈된 시스템 안에서 자아를 잃고 정지된 채 사는 삶은, 아무리 정갈해 보여도 죽은 시간일지 모른다. 그녀는 혼돈을 선택한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흔들림 속에서 진짜 자기를 붙잡는 길을 택한다.

3. 모든 존재가 갖는 고유함에 대한 믿음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 시의 마지막에서 쉼보르스카는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존중을 드러낸다. 확정된 진리보다, 가능성의 여백을 품는 삶. 그건 미완의 상태를 기꺼이 끌어안고 살아가는 태도다.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문장에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미신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자신보다 더 큰 존재와 조심스레 연결되는 어떤 방식이기도 하다. 조심스러움, 경외심, 그리고 침묵의 언어. 쉼보르스카는 '확신'보다 '기다림', '단정'보다 '기울기'를 사랑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것을 고백하는 일의 용기

'선택의 가능성들'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외침도, 삶의 정답을 알려주겠다는 말도 없다. 오히려 아주 작은 기호들을 통해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무엇을 향해 마음을 내어줄 것인지에 대한 그녀만의 방식이 담겨 있다. 단 하나의 격정적 문장 없이, 그러나 조용히 독자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이 시는, 결국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라는 고백처럼 다가온다.

쉼보르스카는 말한다. "별들의 시간보다 벌레들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빛나는 순간보다, 오히려 작은 반복 속에서 삶을 이어간다. 그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틈에서 우리 모두는 '나'라는 고유한 존재로 살아간다. 이 시는, 그러한 고백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 속에서, 아주 담담히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건넨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시가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위로가 아닐까.